진실 혹은 의심(이수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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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홍보실 작성일05-05-25 16:25 조회9,035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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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2005년5월7일)에 게재된 이수영 기자의 시론입니다.
1999년 8월 5일 미국 워싱턴 주의 조그만 도시에서 케네스
리라는 젊은 남자가 칼에 찔리는 사건이 발생했다. 경찰은 그날 밤 마이클 크로퍼드와 그의 부인을 용의자로 체포했다.
크로퍼드는
리를 찌른 사실은 순순히 자백했다. 문제는 당시 상황. 크로퍼드는 리가 자기 부인을 성폭행하려 했다는 얘기를 듣고 격분해서 부인과 함께 리의
아파트를 찾아갔으며, 리가 먼저 자신을 찌르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그를 찔렀다고 주장했다. 정당방위였다는 것이다.
부인의 진술도
크로퍼드의 진술과 대체로 일치했다. 다만 한 가지, 부인은 리가 칼을 꺼낸 시점이 크로퍼드가 리를 찌른 뒤였다고 진술한 점이 달랐다.
이것이 사건의 가장 중요한 쟁점이었다. 부인의 진술이 맞는다면 정당방위는 성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경찰은
크로퍼드를 상해와 살인미수로 기소하면서 부인의 진술을 기록한 조서와 녹음테이프를 법원에 증거로 제출했다.
크로퍼드의 변호인은
조서와 녹음테이프는 전문증거(傳聞證據·제3자를 통해 간접적으로 법원에 전달되는 증거)로서 증거능력이 없다고 주장했다. 미국 수정헌법 제6조의
‘불리한 증언을 한 증인을 대면할 수 있는 권리’도 침해당했다고 주장했다. 부인의 진술을 직접 반박할 수 있는 권리가 크로퍼드에게 주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문제는 부인이 법정에서 증언하면 해결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미국 대부분의 주와 마찬가지로 워싱턴 주
법은 ‘배우자 사이의 증언면제 특권’을 규정하고 있다. 이 규정을 근거로 크로퍼드는 부인이 법정에 서지 못하도록 했다.
크로퍼드는
워싱턴 주 법원 1심에서 유죄, 2심에서 무죄였다가 주 대법원에서 유죄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미국 연방대법원은 지난해 3월 주
대법원의 판결을 파기하고 무죄를 선고했다. 이 판결을 둘러싸고 미국 법조계는 아직도 논쟁 중이다. 한쪽은 미국 형사사법의 승리라고 말하고
반대쪽은 진실이 가려진 사법의 실패라고 주장한다.
미국의 로스쿨은 매년 5월 이맘때 졸업식을 한다. 로스쿨 3년 과정은 피눈물
난다. 그 힘든 여정을 마치고 얻는 것은 무엇일까. 진리(Truth)일까?
아니다. 그들이 도달하는 곳은 ‘글쎄(Maybe)’다.
로스쿨에서 배우는 것은 진리나 진실이 아니라 그 진실에 도달하는 방법과 과정이다. 그 방법은 끊임없이 의심하고 묻는 것이다. ‘글쎄’와
‘아마도’를 반복하면서…. 그래서 로스쿨 과정을 ‘의심에 도달하기(Getting to Maybe)’라고 말하기도 한다.
크로퍼드
판결은 이 같은 미국 법의 정신을 잘 나타내 준다. 미국의 사법은 ‘진실은 아무도 모른다. 다만 절차가 진실할 때 그 결과도 진실에 가장 가까울
것’이라고 외친다.
사법제도개혁추진위원회의 형사소송법 개정을 둘러싼 논란의 근본은 이것이다. ‘Truth’냐 ‘Maybe’냐는
것. 만일 사개추위의 생각대로 형사절차가 바뀐다면 우리는 좋든 싫든 ‘Maybe’의 시대에 살게 될 것이다. 아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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